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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북콘서트 못다한 Q&A] 경계에 선 노동. ‘그들’과 ‘우리’의 경계를 들여다보다

22-11-0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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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11-08 14:09 조회2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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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2022.11.2.(수) 15:00~17:00

■ 장소: 중앙도서관 양두석홀

■ 강사: 희정

■ 사회: 신혜란(서울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다양성위원회 교육홍보소위원회 소위원장)

※ 강연에서 못다 말씀드린 질문 중 중복된 내용을 제외한 답변을 저자가 직접 작성하여 올려드립니다.




Q1.

노동과 퀴어의 교차 지점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 일 것 같아서 반갑게 들립니다. 퀴어 운동은 노동운동이랑 분리된 채로 진행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지점도 있곤 해서요. 퀴어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노동운동에는 거부감을 가질 수 있고, 노동운동에 관심있는 사람이 퀴어운동에는 거부감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까요? 작가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A1.

성 정체성과 노동 문제를 연결지어 활동해온 그룹과 사람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민주노총(노동조합) 안에 성소수자 조합원 모임이 있고,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일명 행성인)라는 단체에는 자체 노동권팀이 존재합니다.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를 집필할 때, 이 노동권팀이 만든 자료와 기록들을 많이 참조했고요. 이들 외에도 관련 저작이나 단체명을 책에 많이 담아 두었습니다.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이런 활동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애쓰는 사람들이 있고, 꾸준한 활동이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 퀴어와 노동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Q2.

한국과 같이 젠더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나라에서 퀴어의 존재를 가시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A2.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가 혼자 답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거 같지만 조금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우리 사회에서 퀴어만 가시화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리에서 다양한 몸과 나와 다른(/다르다고 착각하는) 정체성을 만나는 일조차 흔치 않지요. 거리에는 장애인이 없고, 표준(이라 부르는) 체중에서 크게 벗어난 몸도 보기 힘듭니다. 노인과 아픈 사람은 집에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젠더의 문제도, 이 사회가‘여성’이라고 규정한 범주는 너무 좁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면 “여자답지” 않다고 하는 규범뿐 아니라, 장애인이나 특정 정체성을 무성처럼 바라보는 시선과 지정 성별 여성만을 여성으로 인정(?)하는 문제까지. 이 범주를 넓히는, 아니 그 틀을 깨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그 범주를 좁히려고 할 때, 그로부터 ‘여성’‘남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 때, ‘퀴어’인 것을 숨겨야 하는 사람이 생길 때, 특정한 몸이 거리에서 치워질 때, 그 일을 나의 문제로 연결지어 저항하는 연대 활동이 필요하다. 저는 지금으로는 이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만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3.

작가님의 소개에서 '기록노동자'라는 이름을 보았습니다. 대학원생으로서 저 역시 스스로의 일의 핵심을 '타인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요, 내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가장 속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떠한 경험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작가님도 여러 개인과 감정을 접하고 또 그 이야기 안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혹은 부여하지 않을지)에 대해 고민이 있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직업 전반에서, 그리고 이 책을 위해 이야기를 모으는 과정에서 경험한 감정이나 생각, 고민들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A3.

속내를 들으려고 하진 않는 거 같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걸 들으러 간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자는 타인의 삶에 질문할 권한도 없으면서 질문을 가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요. 저서 <두 번째 글쓰기>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첫 번째 인터뷰는, 인터뷰이인 그가 자신이 가진 살림 중 가장 좋은 찻잔에 차를 내오는 일이라고. 그만큼 체면도 차리고 좋은 면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물론 기록자의 욕망은 그 외의 것을 알고 싶어 하겠지만, 저는 그가 단정하게 내놓은 찻잔도 그 자신이라 여기고 인정하고 존중해야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길 때도 있습니다. 그의 사적인 내막을 알아야 이야기를 잘 듣고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공적인 위치로 그를 만나러 갔는데, 그에게만 사적인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가 자신을 어디까지 드러낼지 선택권을 최대한 보장하며 말하고 듣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이야기를 할 것인지는 그가 판단하며, 그 판단은 그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기록자는 그 옆에서 그의 해석을 잘 듣고 때로는 그 해석이 지나가는 길을 다듬거나 때론 길을 같이 열기도 합니다. 인터뷰 자리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그’의 이야기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인정하고 협의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 기록자는 따로 고민합니다. 내가 중히 여기는 이야기와 그가 중히 여기는 이야기가 어떻게 만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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