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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춘추] 양에서 질로

입력 : 
2019-02-25 00:04:01
수정 : 
2019-02-25 17: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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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가고 멀리 보였던 선진국들을 바짝 쫓게 되면서 자부심과 우려가 교차한다.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으로 바뀌지 않으면 성장도 지속할 수 없고 따라서 '선진국'이 될 수도 없다는 자각이 절실히 다가온다. 올림픽의 금메달 수가 스포츠의 선진성을 나타내지 않고, 인터넷뉴스의 클릭 수가 기사의 가치나 중요성과 관계가 없듯이, 숫자의 크기는 질과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다. 역량과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우리는 숫자를 즐겨 활용한다. 연구자의 경우, 몇 년 동안 몇 편의 논문을 쓰고, 몇 개의 특허를 냈는지 숫자를 세어 연구 생산성을 평가한다. 질적 수준을 판단하는 한 방법으로 논문이나 특허가 다른 연구에 인용된 횟수를 세어 영향력을 수치화한다. 전 세계에서 수십 년에 걸쳐 출판된 학술논문과 도서들의 서지 정보를 모아 인용 양상을 분석해 주는 정보업체들은 이 인용횟수를 기준으로 연구자의 질적 역량을 정량화해 발표한다. 분야별 상위 1%라거나, 노벨상 후보군 등으로 발표되는 연구자 리스트가 그러한 수치에 근거한다. 특허의 인용 횟수와 등록 성공률 등을 계산해 혁신기업 순위를 매기기도 한다.

숫자는 여러모로 편리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숫자로만 표현된 가치는 제한적이고 왜곡될 위험성이 많다. 인용 횟수의 경우, 연구자들이 많이 몰리거나 논문을 많이 출판하는 분야인지 아닌지에 따라 편차가 많고, 때로는 아는 연구자들끼리 품앗이처럼 서로 인용해주는 방식으로 인용 횟수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질적인 가치는 표현하기도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려 평가에서 거의 배제된다. 그러나 온전한 평가를 위해서는 숫자 편애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학에서 교수를 임용하고 승진시킬 때, 연구비 지원기관에서 연구자의 역량과 성과를 평가할 때, 대학 재정 지원사업에서 대학의 역량을 평가할 때, 숫자에 의존하는 비중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 그러려면 정량화하기 어려운 성과와 가치를 드러낼 기준을 다양하게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과들이 왜 특별한지, 왜 새로운지, 어떻게 인류에, 사회에, 또는 경제에 기여하는지를 숫자가 아닌 문자로 풀어내야 한다. 가치를 판단하는 질적 평가 방식이 제대로 자리 잡을 때 우리의 지식생태계는 비로소 선진화할 것이다.

[노정혜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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