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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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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여성 교수가 필요하다

경희대에 ‘여성 교수 뽑아달라’ 대자보 붙어…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는 여성 교수 채용 공고 내
등록 2018-12-01 08:00 수정 2020-05-02 19:29
11월20일 ‘여성-여성학 교수’ 임용을 요구하는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학생들이 자신들이 만든 대자보 앞에 서 있다. 왼쪽부터 김현일(18학번), 백하연(17학번), 박리리(16학번), 김동건(14학번) 학생. 류우종 기자

11월20일 ‘여성-여성학 교수’ 임용을 요구하는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학생들이 자신들이 만든 대자보 앞에 서 있다. 왼쪽부터 김현일(18학번), 백하연(17학번), 박리리(16학번), 김동건(14학번) 학생. 류우종 기자

“사람들은 종종 내게 묻는다.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내 대답은 ‘9명 모두요’였다. 미국 역사상 대부분 대법관 9명이 모두 남자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1992년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여성 연방 대법관이 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말이다. 긴즈버그는 26년째 대법관 자리를 지키며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 편에 선 판결을 내렸다. 긴즈버그처럼 남성 중심적 대학의 구조에 문제제기를 하고 나선 학생들이 있다.

대학교에도 안정성 낮은 자리일수록 여성 많아

지난 10월 초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중앙대자보판에 A2용지 크기의 대자보가 붙었다. 사회학과에 여성학 교수 혹은 여성 교수를 뽑아달라는 이 학교 사회학과 학생들의 요구가 담겼다. 지난 학기 ‘젠더 사회학’을 가르쳤던 여성 교수가 퇴임한 뒤, 사회학과엔 현재 여성 교수는 ‘0’명. 교수 7명 모두가 남성이다. 또 젠더 관련 과목을 가르칠 전임교원도 없다. 이 때문에 9월 말 경희대 사회학과 학생 10여 명은 ‘경희대 사회학과 여성-여성학 교수임용 학생의견 관철모임’을 꾸리고 퇴임 교수의 후임으로 여성 교수 또는 여성학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를 임용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학생들은 대자보에서 “사회학은 현대사회의 변화와 쟁점, 갈등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며 “여성혐오 논란과 미투 운동 등 페미니즘이 사회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 이 시점인데도 여성학이 사회학과에서 부수적인 것으로 대우받는 현실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여성 교수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학생이 수업을 통해 풍부한 관점과 다양한 가치를 학습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경희대 사회학과를 포함한 대한민국 전반의 교수 사회가 성불평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6월 말 ‘후임 교수 희망사항’을 설문조사해 ‘여성 교수 내지는 여성학 전공 교수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반 이상 나왔다는 결과를 교수들에게 전달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학생들은 “사회 전반적으로 시급하게, 무겁게 이야기되고 그 중요성이 부각됨에도 사회현상을 다뤄야 하는 사회학과에 젠더를 연구하는 교수가 없다” “남성 중심적인 학과 분위기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으므로 여성 교수님을 원한다” 등의 의견을 개진했다. 경희대 사회학과의 여학생 비율은 약 60%다.

학교 쪽 반응은 시큰둥했다. 사회학과는 여성학이 아닌 현대사회론 분야의 교수 공고를 했다. 김은성 사회학과 학과장은 학생들에게 10월10일 전자우편을 보내 “교수 채용에 있어 여성 후보를 차별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학생들의 의견 역시 충분히 인지하였다”면서도 “연구 및 교육 역량 중심이라는 원칙을 무시한 채 임용 후보자의 젠더나 특정 학문 분야를 미리 전제하고 임용 후보를 선정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국공립대 여성 정교수 12%, 그나마 특정과 편중

이 학교 사회학과 학생은 “지난해에도 비슷한 설문조사를 해 그 결과를 교수들에게 보내고 대자보까지 붙였지만 교수들은 무시했다. 나중에 ‘대자보라는 방식은 교수들한테 도전하는 것’이라는 반응을 교수들에게서 받았다”고 말했다. 대학알리미 공시 자료를 보면 2018년 기준 경희대 본교의 정교수·부교수·조교수를 포함한 전임교원은 총 1084명으로 여성은 220명(약 20%)인 데 비해 비전임교원은 남자가 872명, 여성이 696명으로 44%가 여성이다. 그중 시간강사는 남성이 355명, 여성이 449명이다. 직업 안정성이 낮을수록 여성이 많은 셈이다.

경희대 사회학과 학생들의 지적처럼 한국 대학교수 사회의 성불평등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2017년 교육통계연보를 보면 국·공·사립대 교수는 총 9만902명이다. 여기서 여성 교수는 2만2879명, 약 25%다. 2014년 24.4%에서 조금 늘었다. 총장은 401명 중 여성이 49명으로 국립대학 총장은 여성이 전혀 없고, 공립대학은 1명에 불과하다. 조교수는 2만7079명 중 여성이 1만497명으로 38.7%이지만 부교수로 올라가면 2만197명 중 5408명(26.7%)에 그친다. 전임교원 중에도 직급에 따라 성비가 불균형한 셈이다. 국공립대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국공립대에서 여성 정교수는 12%, 부교수는 21%, 조교수는 24%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13년 12월 발간한 를 보면 2013년도(2012년 8월과 2013년 2월)에 전국 각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의 34.6%가 여성이다. 지난해 12월 을 보면 전국 4년제 대학 96곳에서 2017년도 하반기에 임용된 신임 교수 중 ‘남성’은 76%에 이른다. 여성 교수는 42명에 불과했다. 박사 학위 취득자에 비해 여성 교수 임용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셈이다.

20% 넘는 여성 교수 비율마저 거품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여성에게 전통적 성역할을 기대하는 가정학이나 간호학의 교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 때문이다. 실제 경희대 간호대학 전임교원 17명은 모두 여성이다. 또 교육통계연보에서도 자연계에 속한 이학은 여성 교수 비율이 22%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공학은 5%, 농림은 9%, 수산·해양은 10%지만, 식품영양학·의류학 등이 포함된 가정대학은 84%로 높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여성 교수 수가 절대적으로 적은 것도 문제지만 간호대학과 가정대학에 여성 교수가 많아 전체적으로 여성 교수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가 있다”며 “인문·사회·경영·경제·공대에서 여성 교수의 비율은 사실상 초토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학문이 사회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남성은 과목과 무관한데 임용되기도”

2003년 교육공무원법 개정으로 국공립대에 ‘여성 교원 임용목표제’를 도입한 덕에 2003년 10%도 안 됐던 국공립대의 여성 교원 비율이 2017년 16%까지 늘었지만, 2010년 목표치였던 20%에는 여전히 못 미친다.

대학들은 여성 교수 비율이 낮은 것이 채용 과정에서 여성 지원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명한다. 하지만 채용 과정이 공개되지 않는 탓에 학생들은 차별이 실제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경희대 사회학과 학생들도 교원 채용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공개 강의를 학교 쪽에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김은성 경희대 학과장은 “학생들의 요구가 있었지만 이미 공개 강의 심사 단계가 끝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경희대 전임교원 임용규정 시행세칙(제8조)을 보면, 전임교원 채용 심사 때 “강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하여 시범강의 또는 세미나를 공개 실시하여야 한다. 이때 학생(학부생, 대학원생)을 참석시킬 수 있다”고 돼 있다. 김 학과장은 “현재 학교본부에 임용 후보자들의 명단을 제출한 상태며 학과는 연구능력과 교육능력을 따져 심사했다. 교수들도 학교본부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혜숙 경상대 교수(사회학)는 “멀리서 보면 대학이 다른 사회보다 평등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대학도 사회의 축소판이라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가 남아 있다”며 “여성 교수를 차별한다는 내용이 문서에 명시돼 있진 않지만 많은 여성이 박사 학위를 받는데도 교수 되기 어려운 결과가 나온다는 건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당성·효용성 측면에서 필요해”

서울 시내 한 대학의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김아무개(33)씨는 “시간강사 자리를 딸 때도 과목과 무관한 남성이 되는 일이 꽤 있다. 교수들의 ‘남성 연대’ 카르텔(담합)을 깨기 어려울 것이다”라며 “여성들이 임용에서 배제되는 것을 보니 애초 한국에선 교수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씨는 현재 외국에서 박사과정을 다시 밟을지 고민 중이다.

지난 9월 서울대 공과대학 전기정보공학부 전임교원 채용에 ‘여성’이 조건으로 내걸렸다. 채용 예정 인원 4명 중 2명을 여성으로 뽑는다는 내용이다. 서울대에 1946년 전기공학과가 만들어진 뒤 72년 동안 이 학부에 여성 교수는 없었다. 서울대 공대 관계자는 “학부 내 여학생 비율이 11%인데, 이들을 지도할 여성 교수가 한 명도 없었다”며 “양성평등의 중요성이 학계에서도 강조되는 상황이라 여성 교수를 채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4월 서울대 경제학부에서도 여성으로 채용 공고에 제한을 뒀다. 서울대 경영학부에선 중국인 손시팡 교수를 빼고는 한국인 여성 교수를 채용한 적이 없다.

2013년 전국 대학에서 여학생의 비율은 39%에서 2017년 41%로 늘었다. 늘어난 여학생들의 롤모델을 보여줄 여성 교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대 다양성위원회에서 2016년에 낸 ‘서울대학교 교원 다양성 증진 방안 연구’에선 “여성 교원 증대를 통한 교원 다양성의 확보는 평등과 다양성의 가치라는 정당성 측면에서도 요구되지만 대학의 수월성 증진이라는 효용성 측면에서도 요구된다. 교원 다양성을 위한 정책의 제도화는 좀더 질 높은 교육과 연구, 사회봉사를 가능하게 하고 남녀를 망라한 대학 구성원 개개인이 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 자신의 역량을 발현할 수 있게 한다”고 밝혔다.

배유경 서울대 다양성위원회 전문위원은 “여성 교원이 늘어나면 연구 주제와 방법이 다양해지고, 학과 운영과 주요 의제도 달라지기 때문에 대학 운영 전반에 변화를 초래한다”며 “단순히 여성의 대표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조직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월성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혜숙 교수는 “여성 교수가 적으면 남성 중심적 관행이 좀체 바뀌지 않는다. 어떤 사회의 분위기나 문화를 바꾸려면 새 문화를 지향하는 인원이 30%는 있어야 한다는데, 교수 사회가 바뀌려면 적어도 여성 교수가 30% 이상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대학 내 여성 교수 비율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학문 전반에서 성인지적 관점에서 학문을 재해석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나영 교수는 “사회학뿐만 아니라 생물학 등에서도 기존 과학적 가설을 페미니즘으로 교정하는 경우가 있다”며 “기존 학문은 여성의 욕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롤모델이 될 만한 교수님이었으면”

박리리 경희대 학생(사회학과 16학번)은 젠더 관련 과목을 수강하지 못하자 이번 학기에 아예 휴학했다. “강사 선생님이 젠더 사회학을 강의하는데 이번 학기에 강의가 열리자마자 인원이 금세 차서 수강 신청에 실패했다. 시간강사가 강의를 하다보니 언제 이 과목이 또 개설될지 알 수 없고, 전임교원이 아니라서 수업이 끝난 뒤 궁금한 점이 있어도 선생님을 만나기 어렵다.” 젠더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게 꿈인 박씨에게 원하는 수업을 듣지 못하는 상황이 다른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에겐 나름 절박한 휴학 사유였다. 그는 “사회학과 학생 60%가 여학우인데, 이 친구들에게 롤모델이 될 만하고 젠더 의식이 있는 교수님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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