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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 미술평론가] 다양성은 혁신을 낳는다. 구성원의 ‘색깔’이 다양할수록 공동체는 보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결과물을 도출해낸다. 다양성은 다채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음으로써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 보스턴컨설팅그룹과 뮌헨공과대가 행한 연구 ‘다양성이 관건이다’(The Mix That Matters·2016)는 통계적인 방법으로 이를 증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줬다.
독일과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171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이 연구에 따르면, 관리직의 다양성 지수가 높은 기업일수록 ‘혁신수익’(innovation revenue) 또한 높게 나타났다. 혁신수익이란 최근 3년 동안 새로 출시한 상품이나 서비스가 창출한 수익을 말한다. 특히 복합기업이나 대기업일수록 관리직의 다양성은 혁신수익의 창출에 보다 큰 기여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상 기업 가운데 다양성 지수가 중앙값을 넘은 기업은 중앙값 아래의 기업에 비해 평균 38% 더 많은 혁신수익을 올렸다.
△기업 관리직 다양할수록 ‘혁신수익’ 높아
이 연구는 모두 6개의 카테고리로 관리자의 다양성 유형을 나눴다. 산업배경, 출신국가, 경력, 성(性), 연령, 학벌의 다양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연령과 학벌의 다양성은 혁신과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신 나머지 네 유형은 통계상으로 유의미한 상관성을 보여줬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기업의 여성이사할당제를 의무화한 것이 이들 기업의 혁신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기업의 여성이사 의무비율은 아이슬란드와 프랑스가 40%, 이탈리아 33%, 독일 30% 등이다). 여성이사할당제를 도입한 목적이 성평등을 위한 것이었지만, 현실에서는 혁신의 에너지로 작용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임원진의 20%가 여성인 기업은 수익 가운데 34%가 혁신수익인 반면, 임원진의 5%가 여성인 기업은 혁신수익의 비중이 25%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가 시사하듯 이제 다양성은 기업이나 여타 공동체가 혁신을 위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됐다.
다양성의 증가가 미술문화의 발전을 선도한 미술사의 대표적인 사례는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이다. 이 시기를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The Golden Age)라고 부른다. 유명한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1606∼1669)를 비롯해 ‘진주 귀고리 소녀’의 화가 베르메르(1632∼1675), ‘초상화의 거장’ 프란스 할스(1580∼1666), ‘미술의 몰리에르’ 얀 스테인(1626∼1679) 등 대가들이 쏟아져 나왔고, 서양회화의 주요 장르가 되는 풍경화·정물화·풍속화 등이 이 시공간에서 그 틀을 온전히 갖춰 본격적으로 분화·발달하기 시작했다. 비록 외형상으로는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만, 이 시기의 네덜란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못지않게 중요한 서양미술사의 리더였다.
△렘브란트·베르베르·프란스 할스…대가 쏟아져나온 17세기 네덜란드
그러나 당시 네덜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이 저지국가가 가톨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때마침 네덜란드에서 ‘성상파괴운동’이 벌어지자 펠리페 2세는 측근 알바 공작을 보내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금·처형되거나 재산이 몰수돼 네덜란드의 상공업 활동이 거의 중단될 지경에 이르렀다. 분노한 네덜란드인들도 무장투쟁으로 맞섰다. 북부 7개 주를 중심으로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1579)해 분리독립에 나선 것이다. 동맹은 창립 헌장에 “누구나 종교의 자유를 가지며 어느 누구도 종교를 이유로 심문을 받거나 박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천명함으로써 자유와 관용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그 결과 여전히 스페인이 장악한 네덜란드 남부(플랑드르) 사람들뿐 아니라 유대인을 비롯해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 등 주변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북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 1570년부터 1670년 사이 암스테르담 인구는 3만명에서 20만명으로 7배 가까이 팽창했다. 1650년의 통계에 따르면 암스테르담 인구 가운데 3분의 1은 외국계 혈통이거나 그 후손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그렇게 진정한 인종의 용광로가 됐다.
당연히 외국계 후손 중에서는 큰 부자가 되거나 사회지도층에 편입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렘브란트의 걸작 ‘야경’(1642)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프란스 바닝 코크다. 훗날 암스테르담의 시장이 되는 그는 아버지가 독일 브레멘 출신이었다. 비록 그의 아버지는 헐벗고 굶주린 ‘꽃제비’로 네덜란드에 흘러들어 왔으나 아들인 그는 암스테르담 행정의 최고위직에까지 올랐다. 무일푼 이민자의 아들로서 암스테르담의 시장이 된 또 다른 독일계 거물이 야콥 포펜이다. 동인도회사의 이사까지 지내며 거부가 된 그는 죽을 때 요즘 돈으로 6000억원이 넘는 유산을 남겼다. 그야말로 다양한 배경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어 다양한 기술과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네덜란드의 부는 급팽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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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네덜란드의 부를 잘 나타내는 게 동인도회사의 규모다. 현재의 달러로 이 회사의 절정기 시가총액을 계산하면 7조 9000억달러(약 9389조원)로, 역사상 이 회사보다 큰 시가총액을 달성한 회사는 아직 없다(우리나라 코스피 상장기업들의 시가총액보다 많다는 최근 애플의 시가총액도 1조 8000억달러에 불과하다).
△가난한 농부부터 부유한 명문가까지…‘미술 자유시장’ 꽃피워
이 같은 부의 확산은 네덜란드의 미술시장을 크게 발달시켰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미술가들은 소수의 패트런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함으로써 먹고살았다. 그러나 “가장 가난한 농부부터 가장 부유한 명문가까지 그림을 사들였다”는 이 시기 네덜란드의 미술시장은 주문시장이 아니라 자유시장으로 활짝 피어났다. 화가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작품을 제작하고 시장에서 이를 자유롭게 사고파는 게 일상화됐다.
공동체의 다양성은 이처럼 네덜란드의 경제와 미술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체류 외국인 수가 늘어나는 요즘의 대한민국이 이런 에너지를 어떻게 혁신의 동력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때 참고할 만한 역사적 선례다.
무슬림 여성들이 수영할 때 입는 부르키니(부르카+비키니)는 레바논계의 호주 여성 아헤다 자네티가 2007년 디자인했다. 부르키니가 나오기 전까지 무슬림 여성들은 물놀이를 즐기려 해도 복장문제로 애로가 많았다. 이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느꼈을 이슬람국가들에서 이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호주에 사는 이슬람계 여성에게서 해결책이 나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주민으로서 자네티가 처한 다문화, 곧 다양성의 상황이 그 같은 창조적 혁신을 자극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양성은 혁신을 추동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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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상파괴운동
16세기 중반 네덜란드 통치권자가 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저지대 플랑드르(네덜란드 남부)에 주교직을 신설하고 칼뱅파의 신교도를 억압하자, 이에 반발한 신교도가 가톨릭교회의 성상을 파괴한 급진적인 반달리즘을 말한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발단해 네덜란드로 확산했고, 1566년 8월에 와서는 ‘우상숭배 말살’이란 구호 아래 네덜란드의 전역으로 퍼졌다. 당시까지 예술품의 주된 수장고였던 가톨릭교회 안의 회화·조각품이 거리로 던져졌고, 군중 앞에서 부서지고 불태워졌다. 사건은 충격적이었지만 이는 네덜란드의 미술사조가 급변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더 이상 화가에게 제단화·성화 등을 의뢰할 수 없어 텅빈 회벽 상태로 비어있던 교회와는 대조적으로, 도시 곳곳에 대중적인 그림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청·사무실 등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사교장·응접실 등 시민의 사적인 공간에까지 영역은 실로 광범위했다. 그림을 사고파는 미술시장이 활성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특유의 ‘다양성’이 작용한 풍경화·정물화·동물화 등 장르에서도 혁신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미술로 삶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미술을 통해 일상의 풍요를 누리도록 글 쓰고 강연하는 일이다. 소명으로 여긴다고 했다. 발단이 있다.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돌연 일간지 기자가 되면서다. 그림에 관심을 잃어서가 아니라 그림을 막은 생계 때문이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그리자 했다. 하지만 ‘투잡’은 쉽지 않았다. 미술담당 기자생활에서 얻은 필력과 생각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왔다. 미술을 대중과 제대로 연결하는 미술평론가의 ‘진정한’ 역할, 그것을 해보자 했다. 그렇게 가나아트 편집장을 하고, 학고재 관장을 오래 한 뒤 서울미술관 초대관장까지 지냈다. 지금은 양현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온전히 글과 강연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은 책이 수십 권이다. 굳이 대표작을 꼽자면 ‘리더의 명화수업’(2018), ‘역사의 미술관’(2011), ‘지식의 미술관’(2009),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 1·2’(200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