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과 포용성이 중요한 이유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스웨덴의 웁살라대학교를 다닐 때 일이다. 국제경제 수업시간이었다. 유엔에 근무하며 인도에 파견을 다녀온 졸업생이 안드라프라데시 지역의 농민 자살 추이에 대한 발표를 했다. 과거 해당 지역에 국제자본이 들어가 쌀농사를 면화로 바꾸는 가운데 농민 다수가 대규모 대출을 받게 되었다. 흉작이 이어지면서 대출을 갚지 못해 이자가 붇자 채무 압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농민의 수가 매해 늘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총리가 방문해 부채를 부분 탕감해 주고 가장이 자살한 가정에는 추가로 위로금을 지급했다. 이후 자살하는 농부의 수는 더 늘었다. 자신이 떠나면 남은 가족이 위로금이나마 더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많은 이가 죽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하수정 북유럽연구소 소장

교수는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떤 정책을 펼 것인지 팀별로 논의해 답을 내라고 했다. 특이하게도 학부 시절 전공으로 팀을 나눴다. 법학과 정치학, 자연과학과 엔지니어링, 사회과학, 교육과 인문학, 경제경영 등 비슷한 분야를 묶어 조를 짰다. 해결책이야 뻔할 텐데 싶어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발표를 들으며 나의 편협과 무지를 절절이 깨달았다.

경제경영팀은 금리 조정과 함께 지역에 2차 가공 시설을 유치해 일자리를 늘리고 생산품의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했다. 인문학과 교육팀은 가계경제와 계약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해당 지역 주민과 아이들에게 심리 치료와 상담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과학팀은 피해농가 분포와 피해액 등 관련 통계를 내 회복 프로그램을 짜고 캠페인을 펼쳐야 한다고 했다. 자연과학과 엔지니어링팀은 기후변화에 상관없이 생산량을 확보할 수 있도록 댐을 정비하고 종자 보존 센터를 만들어 매번 씨앗을 사게 만드는 다국적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정치와 법학팀은 피해자를 만나 상황을 들어 지원하고 원인을 파악해 추가 피해가 없도록 입법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팀은 가장 먼저 회의를 끝내고 차를 마시러 간 팀이기도 하다.

학부에서 몇 년 공부했을 뿐인데 전공에 따라 보는 시각과 해결책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점에 놀랐다. 직업, 성별, 연령대에 따라 또 다를 것이다. 치열한 토론 끝에 나온 모든 답이 소중했고 발표할 때 모두의 진심이 느껴져 눈물이 핑 돌았다.

교수는 다양성이 가져오는 다각적 접근과 포용성에 대해 강조하며 북유럽식 위원회 문화를 설명했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학교를 다니며 학생식당 메뉴를 바꾸는데도 학생대표부터 지역식당조합과 식자재 납품사까지 온갖 관계자를 불러 토론을 벌이는 북유럽식 합의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속으로는 ‘빨리빨리 좀 하지 이렇게 시간을 끌며 토론할 일인가’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수업 이후 시간이 걸리더라도 변화를 결정하는 과정에 모든 이해관계자를 포함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오류와 분열을 줄이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에 다양성과 포용성은 필수불가결하다.

다음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을 이끌 당선인이 “오로지 능력에 의해서만 인재 발탁”을 하겠다 선언했다. 좋은 말이고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당선인이 말하는 ‘능력’의 기준이 무엇일까? 지금까지 발탁한 인재 대다수가 50대 후반·서울대·남성, 법 또는 정치학 전공자다. 발탁된 이들 모두 능력이 출중한 인사일 것임에는 터럭의 의심도 없다. 하지만 개별로 뛰어난 것과는 별개로 지도자는 전체를 위한 결과를 고려해야 한다.

비슷비슷한 배경의 사람끼리 모여 결론을 내면 반드시 사각지대가 생긴다. 조직 내 다양성이 그래서 중요하다. 전 세계를 주름잡는 글로벌 기업, 세계 유수의 연구소, 일류 대학, 소위 선진국 의회가 조직 구성에 다양성을 표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회적 배려대상자’라는 용어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소수자와 약자를 유치하는 이유는 당위의 배려가 아닌 전체의 성과를 높이는 핵심 전략이다. 다양성을 높이는 노력은 사회 전체의 대표성을 보장하는 길이며 의사결정의 오류를 줄인다. 소수가 아닌 모두를 위한 일이다.

어렵고 복잡한 문제일수록 똑똑한 동질의 그룹보다, 덜 똑똑하더라도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그룹이 더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을 보인다는 연구는 여러 분야에서 증명되었다. 오로지 능력에 의한 인재 발탁, 좋다. 대신 능력의 기준이 하나가 아니길 바란다. 대한민국 전체를 위한 의사결정에 사각지대는 없어야 한다. 통치는 상명하복이 아니다. 지도자의 철학과 결단에 “외람되오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정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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